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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인민공사도 평균주의도 실패로 돌아갔다. 인간의 주체적 의지를 담금질했던 그의 문화혁명의 기획은 십년동란으로, 중국현대사의 블랙홀로 먹칠되었다. 돌이켜보면 근 30년 동안 치룬 혁명전쟁, 1945년까지 항일민족전쟁, 45년 이후 국민당과 공산당의 대내전. 그러나 거기서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회주의 건설시기에 종군해야 했던 항미원조투쟁까지. 종국을 모르고 꼬리에 꼬리를 무는 전쟁의 연속으로 드넓은 대륙이 말 그대로 폐허에 다름 아니었을 터, 사회주의중국의 성립으로 세계냉전체제는 강고하게 구축되고, 중국은 오직 자력갱생으로 사회주의건설을 이루어야 했다. 농민혁명인 탓에 대다수 농민이 혁명의 주력을 이루었지만, 농촌에서는 땅에 대한 농민의 집착과 지주들의 횡포가 여전했고, 무엇보다 혁명 이후의 건설과정에서 펑더화이의 눈물이 입증하듯이 농민주체와 지식인중심의 선진세력과의 간극을 해결하는 일은 그리 간단한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거듭되는 대약진과 인민공사의 실패, 있는 것, 믿을 구석이라고는 노동력뿐인데,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의지만 발동한다고 해서 연철이 강철이 되는 것은 아니라는데 마오의 고뇌가 있었을 것이다.
낮은 수준의 평등과 언어의 통일, 여성의 사회적 지위에 대한 법률적․제도적 보장 등 봉건적․종적 질서의 혁명적 해결, 소수민족의 규합, 대중노선을 통한 문화와 정치, 문화와 혁명의 결합, 그것들일까? 마오의 사회주의가 이루어낸 것들.
지난여름 자금성 뒤 인공호수 호우하이, 토요일 밤의 그곳은 여름밤을 이기지 못한 사람들로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호수변을 따라 즐비한 카페들, 피서여행을 꿈꿀 수 없는 이들에게는 그 휘황한 서구식 카페들도 그림의 떡일 뿐이다. 밤하늘조차 나누지 않으면 한 발자욱도 나아갈 수 없는 혹서의 밤. 그러나 그 밤을 가르는 것이 있었다. 당시의 기록을 뒤적여본다. (ko) |